오늘 알아볼 트레이더는 바로 19세기와20세기 주식계의 전설 

"제시 리버모어"

풀네임: Jesse Lauriston Livermore (제시 로리스턴 리버모어)

생애:    1877년 7월 26일 - 1940년 11월 28일 (만62세)

출신지: 미국 매사추세츠 주 출신

그를 가르키는 별명

월스트리트의 곰, 추세매매의 아버지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그 당시 주식판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현재도 쓰이고 있는

가격이 오르면 사고, 내리면 공매도를 하는 이른바 추세매매를 창시한 사람이다.

그의 생애

참고용사진 Paine Webber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리버모어는 여기에 계속 있다간 앞날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10대 초반에 5달러(한화 약 13만원)를 들고 보스턴으로 갔다. 보스턴의 증권브로커회사인 페인웨버( Paine Webber)에서 주식호가판을 정리하는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

1892년 15세의 나이에 그는 시카고, 벌링턴, 퀸시 레일로드에 있는 버킷샵 에서 5 달러를 베팅하게 되고 (여기서 버킷샵은 주가에 베팅을했지만 주식을 사거나 팔지 않은 시설이다  한마디로 도박판과 비슷하다 좋게 포장해서 투기랄까)  그는 $5를 베팅하고  $ 3.12를 받게 된다. 

리버모어는 페인 웨버 (Paine Webber)에서 일할 때 보다  버킷 샵에서 더 많은 거래를 하며 수익 또한 버킷샵에서 벌어들이는게 훨씬 많았으며 

16세의 나이에, 그는 페인웨버를 그만두고 버킷샵에 인생을 올인 하기 시작. 

허나 그당시 제시 리버모어의 어머니는  버킷샵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그 당시 버킷샵은 도박판에 가까운 이미지였음). 그러나 제시 에버모어는 버킷샵에서 큰 수익을 낸 후 어머니에게 1,000 가져다 드리며 자신이 하는 것은 도박이 아니라 투기를 하는 중 이라며 반박했다. (5달러를 1년만에 1,000달러로 만들 정도면 .. 재능이 엄청났었나 보다.)

너무 주식을 잘한 탓 일까 버킷샵에서 출입 금지를 당하고 만다. 

허나 변장까지 해가며 버킷샵을 출입 결국 10만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저축하여

월가로  가게되며 그곳에서 거래를 시작한다.(이미 신이다.)

현재 알려진 제시 에버모어의 시작

1900년대 월가
시세테이프

월가에서 거래하는 동안 시세 테이프 가 현재 거래 결정을 내릴만큼 충분히 빨리 업데이트되지 않아서 파산하게 된다.

 그런 다음 세인트 루이스로 이사하여 버킷 샵에서 베팅을 하며 다시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

그의  큰 수익은 1901년 24세때 였다. 

 

 

북태평양철도 로고

북태평양 철도주식을 사고 난 후 그는 $10,000를 $500,000까지의 수익으로 바꿔낸 것

(현재로 치면 약 1220만원을 6억이상으로 불려낸 것 미래를 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 이후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상황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주가가 급락하자 지속적인 공매도로 엄청난 돈을 벌게 되는데

1907년에 뜬금없는 대폭락이 나타나고 공매도로 또다시 엄청난 돈을 벌게 된다.

리버모어는 그 때 아침시가에 공매도를 시작하면  투매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당시 제시 리버모어는 하루에  100만달러를 벌어들이게 되는데 

미국 은행의 큰손이라 불리는 J.P 모건이 제시 리버모어에게 공매도를 자제 해주라며 백기를 든다 ㄷㄷ  리버모어는 1907년  순자산 가치를  300만달러로 만드는데 성공하게 된다.)

1929년 여름에 시장은 초강세분위기였다. 리버모어는 시장이 보합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파악하고 본격적으로 공매도에 돌입했다. 다른 사람들은 리버모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해 가을 대폭락이 시작되고 그 유명한 1929년 경제 대공황이 오게 된다.

그는 천문학적인 가치의 돈을 벌게되며 언론에서는 리버모어의 매도포지션이 폭락을 촉진했다고 비난할 정도 

약 1억 달러(현재 가치로는 최대 2조까지라고한다.)를 벌게 되었으며  그에게 "월스트리트의 큰곰"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해준다.

일련의 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는 대중의 충돌로 비난을 받고 사망위협 받아 무장한 경호원 을 고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투기 센스에도 불구하고

1934 년 미국증권 거래 위원회가 창설 되고 난 뒤 그의 거래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조사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재산 몰수와 비슷한 처벌이 내려진 듯 그는 결국 재산을 잃었고 1934년에 세 번째로 파산을했으며 84,000 달러의 자산을 잃고  250만 달러의 부채를 기록했다

1940년 11월 28일 모든 자산을 날리고 거래소에서도 쫓겨난 리버모어는 한 호텔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19~20세기의 트레이더 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세계의 투자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존경과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말년엔 불행 했을지 몰라도 그의 감각적 투자는 지금도 따라올 수 있는 트레이더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제시 리버모어의 명언

시장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견해는 틀린다

대장주들을 따라가라

투자는 없고 오직 투기만 있다

주식에서 돈은 일 년에 매일 또는 매주 연속적인 트레이딩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익은 항상 자기 관리를 하지만, 손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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