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버핏(Warren Edward Buffett)

이름: Warren Edward Buffett(워렌 에드워드 버핏)

국적: 미국

출생:1930년 8월30일(한국나이 90세)

미국 네브래스카 오마하

신장:178CM

오늘 알아볼 사람은 역사상 최고의 주식투자자 이자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리는 남자 

'워런 버핏'에 대해 알아보자.

워런 버핏의 일대기

6살 워런 버핏

 

6살 때 껌과 콜라를 팔았다고 한다.(이미 6살에 경제에 눈을뜬 천재인가?)

나는 6살때 뭐 했더라..

11살 워런 버핏

11살 때 차트를 보고 Cities Service (석,가스를 다루는 회사)를 1주에 38달러에 총6주를 매입

40달러에 매도 했으나 후에 200달러까지 치솟음(이후에 장기투자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Cities Service

 

AT&T

12살쯤 워싱턴으로 이사를 감. 선생님이 AT&T 주식을 갖고 있다고 하자 AT&T를 공매도 한 자신의 거래내역서를 보여줘 선생님의 기를 찍어누름 ㄷㄷ

15살에  

자산 2천달러중 1천200달러로 오마하 북부의 농지 49,000평을 사서 관리인을 고용한 후 농장으로 돈을 벌기 시작

17살에

그의 친구와 함께  고장난 

25달러짜리 핀볼기계를 사서 고친후  동네 이발소에 공급하는 대신  그 수익금의 일정액을 챙기기로 했고 

(핀볼 기계를 설치하게만 해주는댓가로 이발소 사장님은 핀볼기계의 20%수익금을 챙기게 해줬다. 이미 엄청난 사업수완을 보여준다. )

 

25달러짜리 기계로 

하루만에 4달러를 벌어들인다. (나이를 생각하면 ..) 이후 핀볼 수리업자와 자기친구 버핏은 

Wilson's Coin-Operated Machine 이라는  회사를 설립 고장난 핀볼기계를 25달~35달러에 7대정도를 구매 하였고 

동네의 다른이발소에들도 핀볼기계를 설치 

1년 후 동업자인  핀볼 수리업자에게 이 사업을 1200달러를 넘기게 되며  자산 6천달러 돌파 

초등학생 때부터 월반해서 동기들보다 일찍 대입 자격을 획득했다. 그러나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투자와 사업으로 이미 경제적 성공을 이뤘기에 자신을 사회인으로 생각했고 대학 진학은 시간낭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이 자신을 가르치기에는 수준미달이라고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결국 대학 진학을 하게 된다.(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데 거꾸로 부모가 자식을 이긴 케이스인가)

허나 아버지도 월가 출신 이기에 .. 

 

 

본래 펜실베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경제학부에서 2년간 배우다가, 네브래스카 대학으로 옮긴 뒤 조기졸업으로 학사를 취득하고, 컬럼비아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취득했다.

네브래스카 대학교

네브래스카 대학 학부 졸업 후 그는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지원했으나 면접을 망쳐서 떨어졌다. 후에   버핏이 그의 친구에게 말하길 "난 하버드의 네임밸류, 즉 간판이 탐이 났던 것 같아. 하버드가 원하는 인재상이랑 나랑 맞지 않았던 것 같아. 반성해야지."라고 말했다고. 하버드에 떨어진 후 다시 대학원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때 찾은 것이 바로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이다.(이 컬럼비아 경영대학에서 버핏은 (이미 대단한 천재이지만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얻는다 마치 스포츠카에서 제트기 엔진까지 생긴 느낌이랄까))

 

그곳에서 벤저민 그레이엄 만난다.

그레이엄은 필립피셔와 함께 버핏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

워런버핏 말로는 15% 피셔에게 85%는 그레이엄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이니 주식투자에 관련된 서적 중에서 그레이엄과 피셔의 것을 능가하는 것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할 정도이다.

 

이로써 워런버핏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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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는 필자의 개인적 생각이다.

허나 한국주식시장에서 워런버핏을 믿고 장기투자를 하다가 돈이 휴지조각이 됐다는 경험담을 많이 들어볼 수 있다.

워런버핏은 한국사람이 아닌 미국사람이다. 

100년 다우지수

이 차트만 봐도 답이 나온다 .. 워런의 나이 90세 100년짜리 차트로만 봐도 워런의 가치 중장기 투자적 관점대로면 살아남을 수 있는 시장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워런버핏과 동시대에 살아도 저렇게 벌 수 있을리 없다. )

한국 지수

20년짜리 차트를 가지고 100년과 비교하는게 말이 안되긴하나 우리나라 시장의 경우 대외적 충격에 너무 쉽게 흔들리는 경향이 있고 미국시장처럼 자금유동성이 활발한 것도 아니기에 워런의 투자관을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온전히 접목 시키기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우리는 살면서 메신저 앱 하면 보통 네이버 라인, 페이스북 메신저 , 카카오톡 등을 떠올리는데 요즈음 들려오는N번방 사건

그리고 그곳에서 언급되는'텔레그램'

도대체 텔레그램이 뭐하는 앱 일까? 

필자와 함께 알아보자.

 

텔레그램

텔레그램의 앱 이미지

우선 텔레그램은 우리가 흔히 아는 카카오톡 , 네이버 라인, 트위터,와 같은 인스턴트 메신저의 종류중 하나인 앱이다.

2013년 8월23일 첫 발매

독일 Telegram Messenger LLP사가 개발/운영 중인 오픈 인터넷 모바일 메신저이다.

 

처음엔 러시아에서 시작 하였으나 개발자측과 러시아 정부간의 다툼 끝에 독일로 넘어가 결국 독일 어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자 우리가 알고싶은건 이딴게 아니다 

그 많고 많은 어플 중 왜 하필 텔레그램은 항상 이런 사건에 엮여있는걸까 그 이유는 ?

보안이 굉장히 좋기 때문인데.

카카오톡 사찰 사태 당시, 언론에서 안전하다고 얘기한 것은 텔레그램의 비밀 대화를 말한다. 비밀 대화는 종단간 암호화를 적용하여 두 단말기 간에서만 복호화가 가능한 비밀키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서버는 암호화된 메시지를 단순히 전달해주는 기능만을 하기 때문에, 서버에 감청영장이 부과되어도 볼 방법이 없다. 여기에 추가로 자동 대화 삭제 등의 기능도 제공하며, 카카오톡 등에서 제공하는 대화 내용 저장 기능도 보안 문제라고 제공하지 않고 있다.

비밀대화?

비밀 대화의 경우 모바일 버전에서만 이용 가능하다. 비밀 대화에서는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언제든지 지울 수 있으며, 지운 메시지는 상대방의 화면에서도 지워진다. 또한 (텍스트, 이미지, 동영상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메시지를 보낸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메시지가 자동으로 삭제되는 '자동 삭제 타이머'를 설정할 수 있으며 
비밀 대화에서 스크린샷 기능을 사용해 대화를 캡쳐하면 스크린샷을 찍었다는 알림이 상대방에게 뜬다. 하지만, 안드로이드에서는 캡쳐 자체가 차단된다.

원래 증권가에서 암암리에 사용하던 앱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한국내의 특정 메신저를 사용하다가, 검찰이 요청한 대화 내용을 운영사가 제공하는 바람에 구속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돌자 대화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한 보안 기능 때문에 인기를 끌었는데, 2014년 9월부터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 팀 신설에 대한 소식을 시작으로 일반 이용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으며, 카카오 사찰논란이 터지자 완전히 이용자가 폭증하게 되었음.
증권가에서나 세간에서나 사용하는 이유는 비슷하다.

이미 한국 내 이메일 업체들이 수사 협조 요청 한 방에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간단하게 검찰에 제공하는 모습이 이슈가 되자 유저 상당수가 Gmaill(구글이메일)로 갈아탔던 시기가 있었다. 구글도 요새 세계 각국에서 정보 제공 요구에 협조하는 경우가 늘었지만 한국은 이미 한국 내 업체부터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시 되기에.. 
암튼 이래서 텔레그램으로 넘어갔었다.
카카오톡이 이미 시장을 독점한 상황에서 텔레그램이 대체재로 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위와 같은 국가 기관의 무분별한 사찰에 대한 반발이었다. 러시아의 사찰을 피해 독일로 망명할 정도로 소신이 뚜렷하고, 상업적인 부분에서도 타협이 없는 업자라면 개인 정보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심지어 제 손으로 편집까지 해서 바친 카카오보단 좋다 생각한듯.테러 방지법 이 통과되면서 텔레그램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다시 오르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요즘들어 텔레그램이 자주 등장하기에  흔히 영화에서 보는 그런 메신저 처럼 비춰질지 모르나

필자가 보기엔 그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삼성전자

삼성로고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를 수 없는 기업 우리나라의 유가증권시장의 약20%이상을 차지하는 거대기업이자 대한민국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기업 삼성전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창업주 이병철씨 생전모습

설립일:1969년1월13일

창업주: 이병철

업종:이동전화기,가전제품,반도체 제조업

본사: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삼성로 129(매탄동)

시가총액(2020-3월24일기준):약280조2,813억원

.창사 이래로 세계시장에서 한국기업으로 전례없는 성공과 인지도를  쌓고 있으며, 쌓아 나갈 기업으로 한국에서는 가장 사회적 영향력이 높은 기업으로 손꼽힌다.

 

 

삼성본사(수원사업장 삼성 디지털시티)

필자가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

 

삼성전자 로고의 변화

삼성전자는 간단하게 말해 로고의 변화가 곧 사업의 변화나 마찬가지였다.

1968년'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경영 일선에서 퇴진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이에 따라 1969년 삼성전자공업 및 삼성-SANYO전기가 설립

→1970년 삼성-산요전기 측은 흑백TV를 생산해 이듬해 파나마에 처음 수출했고, 삼성전자도 1970년 백색가전 및 음향기기를 생산했다.

→1973년 삼성전자는 삼성일렉트릭스를 합병한 후 이듬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고, 1975년 삼성산요가 '삼성전기'로 바꿨다가 1977년 삼성전자에 합병되었다.

위의 사진은 라이벌 사 였던 금성 흑백 텔레비전'VD191'이다. 필자가 사진을 못구해서 이런식으로 생겼었다.. 정도만 참고해주길 바라며..

이후

1977년 흑백TV 수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1978년 업계 최초로 미국에 현지법인을 뒀고, 1979년 한국전자정보를 인수하며 국내 최초로 VTR과전자레인지를 생산 ㅡ> 1980년 삼성반도체를 합병한 후 반도체개발에 적극 나서며 1982년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했고, 1984년 사명을 삼성전자(주)로 변경했다. 1986년부터 <휴먼테크>라는 기업 PR 카피를 내세우며 같은 해 세계 최소형/최경량 4mm VTR을 개발했고, 1987년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에 삼성종합기술원을 열었다. 1988년 삼성반도체통신을 합병하고 1989년 부문별 사장제 개편 후 광주전자를 설립하였다. 1991년 휴대폰 개발 후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했고, 1994년에 256M D램, 1996년에 1G D램도 최초로 개발했다. 1997년 30인치 TFT-LCD를, 1998년 128MB SD램 / 128MB 플래시 메모리. 1999년에 MP3 휴대전화 및 3D TFT-LCD 모니터를 세계 최초로 각각 개발해냈다. 2010년 삼성디지털이미징과 광주삼성전자를 합병한 후 2013년 삼성광통신도 합병했고, 2016년 프린팅솔루션사업부를 에스프린팅솔루션으로 분사시켰다.

그리고 현재

크게 반도체, LCD, 휴대폰, 가전 부문으로 사업부가 나뉘었으나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불어닥친 글로벌 경제 위기에 대응해 반도체와 LCD로 대표되는 부품 부문과 TV와 휴대폰, 냉장고로 대표되는 완제품 부문으로 사업부를 통합했다. 분야가 완전히 달랐던 삼성테크윈의 디지털 카메라 부문과 삼성SDI의 플래시 메모리, 낸드플래시도 통합되었고 그 외 삼성전기 LED 사업부도 통합되었다.

 

2015년 10월 11일 기준으로도 200조 원을 넘어 2015년 10월 11일 기준 시가총액 2위부터 5위까지 차지하는 나머지 기업들의 시가총액을 합쳐도 삼성전자를 절대 넘길 수 없고, 삼성전자 보통주를 제외한 10위까지 포진한 기업들까지 합쳐도 넘길 수 없다.

2015년 기준으로 이미 삼성전자의 덩치는 다른 종목이 넘볼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세계 시장에서 DRAM, 플래시 메모리및 하드디스크, SSD, 메모리 카드등의 반도체 부분과 LCD디스플레이, PDP 디스플레이, OLED 디스플레이 등의 디스플레이 부분, 그리고 TV, DVD 플레이어, 블루레이 플레이어 및 홈시어터 시스템, 셋톱박스 및 프로젝터 등의 영상가전 부문, 휴대폰, MP3플레이어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 등의 휴대용 가전, 데스크탑과 모니터, 노트북, UMPC, ODD기기, 프린터및 복합기, 팩스, 테블릿 컴퓨터 등의 컴퓨터 사업부문,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전기오븐, 진공 청소기와 에어컨 등의 가전부분 등 60종 이상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지금은 이병철회장→이건희 회장→이재용 부회장 순으로 3대가 삼성을 이끌어가는 중이다.

 

 

통화스와프를 하는 이유 중 대다수는 미래의 경제학적 리스크를 대비하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배웠다. 

예를 들어 외화는 물건처럼 시장에 나와 있어서 아무때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무역에 흑자가 나고 가진 자산이 많아도 자국 통화(한국의 경우 원화)가 기축통화가 아닌 한 급박하게 외화가 필요할 때 그 외화가 없으면 민간기업으로 치면 흑자도산에 해당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여기서 기축통화란? 

국제간의 결제나 금융 거래의 기본이 되는 화폐를 말한다.

#2 기축통화가 되기 위한 기준 

달러와 금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그 나라의 보유량이 전세계 1등이어야 하며 어마어마한 무역 적자를 봐야 한다.

(기축 통화가 되려면 전 세계에서 사용되어야 하므로 국내로 들어오는 돈보다 국외로 나가는 돈이 더 많아야 한다.

따라서 엄청난 무역적자를 봐야 한다.)

 

 

월스트리트

두번째로 금융업이 엄청나게 발달된 첨단 금융시장이 존재해야 한다.

(참고로 미국의 주식시장규모는 세계 1위로 2위인 중국보다 약 5배가량 크다)

 

2020년 피치가 내다본 국가신용도

마지막으로 국가의 신용도와 물가가 안정되어야한다. 이를 모두 충족 시키는 나라는 미국 뿐이다.

그래서 미국 달러가 기축 통화인 것이다.

 

참고로 무역통화(거래통화)와 혼동되기 쉽지만, 기축통화는 단순히 무역거래에서 쓰이는 것만을 말하는게 아니다.

세계적으로 통화 신뢰성이 높으면서, 충분한 유통량을 지녀야 기축통화라 할 수 있다. 이유는 금본위제도에서 미국 달러로 중심 통화가 넘어 왔을 때의 대전제조건이 금을 대신할만한 화폐로 지정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전세계적으로 거래가 가능해야 하며, 많은 금을 보유하여 높은 가치 담보성을 지녀야 하며,

한나라의 경제가 아닌 전세계 생산량의 모든 거래 수요도 충족시킬 정도의 통화량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화 스와프 :통화교환(스왑)의 형식을 이용하여 단기적인 자금 융통을 행하기로 하는 계약을 의미한다.

간단하게 얘기하여  두 나라가 자국 통화(예: 대한민국 돈)를 상대국 통화(예: 미국 달러)와 맞교환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통화 스와프가 어떤 것인지는 간단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를 시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통화 스와프를 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미래의 경제학적 리스크를 대비하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2020년 3월 19일, 한국은행과 연방준비제도 간에 600억(한화 약 77조) 미국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계약이 체결되었다. 기한은 일단 2020년 9월 19일까지 6개월이다. 추후 한미 간 협의를 통해 기한 연장이 가능하다. 2020년 3월 19일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입장문을 통해

대한민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브라질, 멕시코, 싱가포르와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했음을 발표하였다. 이 중,

•호주, 브라질, 대한민국, 멕시코, 싱가포르, 스웨덴 : 600억 미국 달러

•덴마크, 노르웨이, 뉴질랜드 :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신규로 체결하였다고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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