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매도

주가 하락이 예상되는 종목의 주식을 미리 빌려서 팔고 나중에 실제로 주가가 내려가면 그 내려간 값에 다시 사들여 빌린 주식을 갚아 차익을 남기는 투자 기법입니다.

공매도, 한자 그대로 없는걸 판다라는 것

일반 주식 매수와는 다르게 비싸게사서 싸게 팔면 이득인 부분입니다.

한마디로 하락장에선 정말 최고의 방법 중 하나인 것입니다.

특이점으로는 현물시장에서만이 아니라 채권, 외환, 파생상품 시장에서도 공매도는 존재합니다.

공매도의 종류

  • 무차입 공매도 : 미리 대상 주식을 빌려두지 않고 하는 공매도입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 빌린 주식이 없기 때문에 공매도 실행자와의 약속을 담보로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4월 이후 무차입 공매도가 금지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무차입 공매도는 금지되거나 강하게 규제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차입 공매도 : 위에서 말한 상황처럼 먼저 주식을 빌린 후 그것을 팔고, 나중에 다시 싸게 사들여서 갚는 방법입니다. 

 

대한민국은 개인은  공매도 금지인가?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과 일본 등 큰 주식시장들에 비해 외인과 기관에게 핸들링당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공매도는 흔히 기관과 외인만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금액이 큰 기관과 외인은 하락장에서 공매도로 돈을 벌고 타격을 줄일 수 있으나

개미인 일반인들은 그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맞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공매도의 장점을 나열해봤자 인 것 이죠.

미국과 일본에선 공매도의 순기능과 장점이 제대로 적용될진 모르지만 한국시장에선 아닙니다.)

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요. (그래도 방법이 어렵고 일반 투자자들은 엄두도 못 낼 정도이며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 대차거래: 증권사가 자산운용사나 투자자문사에 주식을 빌려주는 것으로 증권사가 자사 고객을 통해 조달할 수 없는 경우 한국 예탁결제원 또는 한국증권금융을 이용하는 기관 간 거래이며 보통 억대의 금액이 오고 갑니다. ( 이 경우 개인도 가능한데 50억 이상의 자산가이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조건이 붙습니다.) 기간은 3~6개월 연장 가능
  • 대주거래: 증권사가 개인에게 주식을 빌려주는 것. (인지도가 적고 높은 이자율, 대주 물량 부족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주거래의 경우 증권사마다 상이하므로 물량이 다 다릅니다. 기한은 대차거래보다 짧습니다.

공매도의 장점

1. 주식시장의 효율성 증가

주식의 가격은 사려는 자와 팔려는 자의 균형으로 나타나는데 주식을 사는 사람이 아무런 제약이 없으면 주가가 상승할 것이라고 생각한 투자자의 의견에 반박 없이 시장에 반영됩니다.

그런데 공매도가 없다면 주가가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투자자의 의견은 제대로 반영되기 힘들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팔려는 사람은 기존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바이오주가 현저히 고평가라고 생각하고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를 주가에 반영시킬 수 없기 때문이죠.

2. 주식시장의 유동성이 높아진다.

공매도가 없다면 매수자가 매도자에 비해 훨씬 많아 거래가 원활히 진행되기 힘들고 그에 따라 자금 유동성도 낮아집니다.

공매도는 일반적인 거래와 달리 먼저 매도를 한 후 매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유동성이 증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공매도를 통한 회사의 부정적 경영방침을 이슈화 

공매도를 계속해서 하게 되면 그 회사에 문제점이 생겼다고 인식을 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경영진이 숨기고 있는 악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죠.

공매도의 단점

1. 미리 공매도를 한 후 거짓 소문을 낸다던가 추측성 기사로 하락을 극대화시킨다.

공매도가 많아지기 시작하면 당연히 투자자 입장에선 회사의 악재나 공매도가 시장에 나오게 될 경우 일반적인 개미는 그 공매도 폭탄을 견디지 못하고 하락하는 것을 구경만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2. 회사에 대한 안 좋은 평가

실상 회사가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었음에도 잦은 공매도로 인해 회사의 평가절하와 경영진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공매도에 대한 주식투자자들의 여론

개인투자자들 대부분이(필자 포함) 공매도를 좋지 않게 봅니다.

개인 투자자가 공매도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입니다.

우리나라는 대주와 대차거래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일반인은 거의 대주만 가능하죠. 

하지만 대주는 위에서 처럼 개별 증권사의 대주 물량이 있어야만 가능하고 제한적입니다.

그렇기에 개인들은 주가가 내려가는 것보다 올라가는 상황일 때만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외인/기관의 경우는 다르죠. 오를 때도 돈을 벌며 내릴 때도 돈을 법니다.

기관과 외인의 경우 사후 신용제도라 하여 대차거래를 무제한으로 진행할 수 있는데 개인투자자들도 대차거래를 가능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5000달러 이상의 예탁금 +보유주식을 가지고 있는 개인투자자도 대차거래를 예탁자산에서 500% 범위까지 무제한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200만 엔(약 2000만 원) 정도의 예탁금 +보유주식만 있으면 예탁자산에 300%까지 대차거래가 제한 없이 가능합니다.

당연히 공매도 실패 시 개인이 책임지고 반드시 상환해야 하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요.

 

보잉( The Boeing Company)

미국기업

1916년 7월 15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설립자: 윌리엄 E. 보잉(Willian Edward Boeing)

 

윌리엄 E.보잉

현 CEO: 데이비드 L. 캘훈

 

보잉은 1916년 7월 25일 윌리엄 보잉이 시애틀에서 창립한 미국 항공기 제작회사이자 방위산업체입니다.

현존 최대의 항공기 제작회사이며 동시에 세계에서 손가락안에 드는 방위산업체이죠.

현재 미국내에선 록히드 마틴, 노스롭 그루먼과 함께 3대 항공우주산업체로 뽑히고 있습니다.

왠만한 항공우주에 관련된 것은 대부분 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가장 큰 라이벌로는 유럽의 에어버스가 있지만 기업의 규모나 수익을 보면 보잉이 압도적 입니다.

보잉의 역사

보잉은 1916년, 시애틀에서 창립주인 윌리엄 E. 보잉(William Edward Boeing, 1881~1956)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때의 이름은 '태평양 항공기 제작사(Pacific Aero Products Co.)'였습니다. 1917년에 비로소 '보잉 항공기 회사(Boeing Airplane Company)'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보잉은 초창기에 주로 수상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항공기는 주로 나무로 된 뼈대에 방수천을 덧대서 기체를 만들었는데, 보잉은 예일대에서 목재에 대해 공부하기도 했었고, 또 한 동안 목재회사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어서 이런 항공기용 나무 뼈대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보잉 314

세계대전은 보잉을 가장 강력한 군용기 제작사로 거듭나게 해 주었다.

이때 주로 생산된 보잉의 군용기로는 전설의 폭격기로 불리는 B-17, B-29, B-47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대전에 군용기  생산 라인에만 몰두해서  의존도가 높은 나머지 상업용 여객기에 대해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됩니다. 보잉은 247이라는 세계 최초의 현대식 여객기를 개발하였만, 더글라스의 DC-3에밀려 매우 저조한 판매량을 보여주었고 그 이외에도 247, 307, 보잉314, 377 등의 여러 가지 여객기를 개발하였지만 갱쟁사인 더글라스가 완전히 민항기 시장을 위해 개발한 것과 다르게 대부분이 군용기를 민항기로 판매하기 위해 수정한 것이고 성능도 좋지 못했기 때문에 여객기 제조사로써의 보잉은 인지도가 높지 못했습니다.

 

더글라스 사의 DC-3
보잉 707

바로, 세계 최고의 명작 제트여객기이자 모든 제트 여객기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707의 개발입니다. 707의 개발은 보잉의 사장이 민항기 개발을 놓고 고민하던 중, 자사의 폭격기인 B-47 을 탑승해보게 되었고 제트 항공기의 편안함과 정숙성에 감명받은 것이 큰 원인이었다. 경쟁사인 더글라스와는 달리 제트 여객기가 미래의 주 교통 수단이 될 것이라 예측하여 중장거리를 운항할 수 있는 당시로써는 대형 여객기였던 707을 내놓으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보잉에게 일어난 가장 큰 일은 당시 라이벌 이었던 맥도넬 더글라스 와의 합병이다. 맥도넬 더글라스는 DC-10의 연이은 심각한 추락사고, MD-11 의 성능 부족으로 인한 판매 부진과 주문 취소, MD-80의 주문량 감소와 MD-90의 실패, 그리고 맥도넬 더글라스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힌 미국 공군의 공격기 사업 취소로 인하여 회사자체가 휘청거리던 상황이었습니다. 보잉은 맥도넬 더글라스의 군용기를 상당히 탐내었고, 맥도넬 더글라스를 인수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상황이 더욱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진 맥도넬 더글라스는 보잉의 인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1997년 맥도넬 더글라스와의 합병이 성공적으로 성사되면서 엄청난 규모의 초거대 방위산업체로 거듭나게 됩니다.

보잉 위기가 찾아오다.

보잉 737 MAX 8기종의 모습

1.

2018년 10월 29일, 라이온 에어 소속 737 MAX8이 바다로 추락해 737 MAX의 첫 사고가 발생 하게 됩니다.  사고기는 불과 사고 두 달 전인 2018년 8월 13일 라이온 에어에 인도가 되었습니다. B737 MAX의 첫 번째 인명 사고가 발생한 것 입니다. 이 사고를 조사한 미국 연방항공청(FAA)과 보잉이 2018년 11월 8일 B737 MAX 기종의 소프트웨어 결함 가능성이 있다며 안전경보를 발령했습니다.

2.

2019년 3월 10일, 에티오피아 항공 소속 737 MAX 8 여객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 합니다.

해당 항공기는 승객과 승무원 157명을 태우고 아다스아바바를 떠나 나이로비로 향하던 중 이륙 6분 만에 추락했다. 위에서 언급된 라이온 에어의 사고기와 완전히 동일한 모델로, 불과 4달여 만에 똑같은 새 비행기에서 추락 사고가 또 발생하고 만 것 입니다. 문제는 고도 상승 불가, 급선회 불가라는 두 증상이 두 사고에서 모두 나타났다는 공통점이 발견 된 것 입니다. 

이후 보잉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다?

이후 보잉의 수주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고 코로나 악재까지 겹친 상황에서 항공업계에 큰 타격이 생기자 

보잉에게도 엄청난 타격을 주게 된다.

22일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보잉은 최근 코로나 19로 인해 항공산업에 엄청난 피해를 본 상황

600억달러(약 77조 4400억원)의 자금지원을 정부에 요청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기자회견에서 "보잉을 절대적으로 보호해야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잉의 위기

더불어 신용등급마저 A-에서 BBB로 강등 당한 상황 

과연 보잉은 과거 미국의 GM처럼 망해버릴까요? 

보잉이 사라진다면 라이벌인 유럽의 에어버스가 민간항공업을 차지하게 될텐데

그걸 미국이 바라진 않을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보잉의 미래는 어찌될까요.

우리나라 제약/바이오와 더불어 전 세계 제약 바이오 회사들은 미국 식약청인 FDA에 임상 신청 그리고 요즘 코로나 진단키트 미 FDA 승인 등과 같이 FDA 승인만을 목표로 바라보고 열심히 약과 여러 의료용품 등을 개발한다.

FDA:  Food and Drug Administration  

 

식품이나 의약품, 화장품, 동물약, 장난감 등 소비자가 평소 생활에서 접하는 제품에 대해 그 허가나 위반품 단속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미국의 국가행정조직으로 한국의 보건복지부에 해당하는 HHS(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 보건사 회복 지부)에 소속한 기관이며 역사가 굉장히 깊다.

 

FDA는 국제기관도 아니고 중립적인 단체도 아니며 미국이라는 한 나라의 정부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신뢰성 때문에 FDA인증은 국제적으로 어디에서나 인정을 받는다.

 

FDA는 절차가 굉장히 까다롭고 승인이 나면 뉴스에 나올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대우가

남다르다.

 

 

1900년대의 미국의 라듐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FDA가 커질 수밖에 없던 이유)

 

1900년대 초 미국에서 잘못된 의약품 남용과 의사들과 제약회사의 부정부패로 인해 마약이나 방사능이 함유된 약품들이 시중에서 버젓이 처방되어 유통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래서 수많은 부작용과 사망까지 빈번하게 일어나게 된다. 심지어 지금은 방사능 물질로 분류된 "라듐" 마저 그 당시엔 만병통치약으로 불릴 정도였다.

 

FDA의 절차가 까다로워진 결정적 이유(FDA가 막강한 기관이 된 이유)

 

그러다가 결국 의사들로부터 라듐이 함유된 '라디톨'음료를 처방받고 3년 동안 약 1400병을 마시고 사망한 당시 사업가이며 골프선수로 유명했던 "에벤 바이어스" 사례가 터진 후

(향년52세에 각종 암과 방사능 피폭에 의해 이미 몸이 다 망가져버려 3년 만에 사망하게 됨.)

 

미국 정치권이 이런 사례들을 모아서 미국 의료계와 제약회사들을 철저히 조사한 후 FDA는 엄청나게 강력한 권한을 가진 정부기관으로 탈바꿈 되게 된다.

 

 

FDA 승인이 나게 되면 무엇이 좋은걸까?

 

우선 이러한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했다는 것은 안전성이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해 그 기업의 신뢰성이 굉장히 증가한다.

또한 FDA의 인증마크를 달고 제품을 판매할 수 있으니 그 제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도 가능할 터

 

따라서 수출시장에서 국제인증은 그 나라의 시장 진입 여부를 결정짓는 출입증이자 동시에 국제인증을 받지 않은 제품은 수출을 하여도 수익이 감소하게 됩니다.

 

이러한 어려운 인증 장벽을 뚫고 인증마크를 받아낸다면 수출시장이 굉장히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동시에 같은 품목을 파는 내수시장에선 당연히 중소기업이 대기업보다 약세를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국제인증 마크 등을 통해 중소기업의 생존의 길도 넓혀주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도 주는 것이기에 FDA가 가지고 있는 중소기업 입장에선 놓칠 수 없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번 코로나 진단키트와 관련해 미국이 먼저 선제적으로 키트를 요구함에 따라 키트의 FDA진입장벽이 한시적으로 내려가게 되어 어찌 보면 수혜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에 실시간 검색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현재 뉴스를 보면 코로나와 비슷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검색어가 있다.

바로 "국제유가의 하락"

가볍게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기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인데 좋은 거 아닌가? 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오늘은 국제유가의 중요성과 유가의 하락이 무조건적으로 좋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유가하락

 

국제유가

간단히 말해 세계 유가(기름의)값이다.

 

 

기름

석유는 인류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니 석유의 국제 가격은 국제 정세를 급변시킬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이 존재한다. 유가가 급증하여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을 오일 쇼크(거꾸로 유가의 가격이 떨어지는 경우도 같은 오일쇼크)라고 말한다. 

유가가 오르면 경기침체로 인해 유류소비가 줄어서 유가가 떨어지고, 다시 경기가 회복되면 또 오르는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다수이긴 하나 백 프로는 아니다.


세계의 석유시장에서 석유는 예외없이 달러로만  거래되기 때문에 달러가 오르면 유가가 떨어지고, 달러가 내리면 유가가 오른다. 사우디와 러시아의 경제는 석유산업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산유국들의 화폐가치는 유가와 직결된 경우도 많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게 된다.

 

산유 생산량의 2위인 사우디와 3위인 러시아 간의 유가 전쟁이 시작된 것

코로나로 인해 원유 수요가 급감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에 따라 유가가 하락할 조짐을

보이자 

지난 3월 6일 OPEC+(석유수출국 기구 주요 산유국들 모임) 회의에서 유가 생산량을 추가 감산 하자는 합의가 결렬되어버린 것.

OPEC의 수장 격인 사우디가 감산을 통해 유가를 유지하려 했지만 러시아가 반대하며 시작되었다.

사우디는 8일 원유 공식 판매 가격을 배럴당 6~8달러로 낮춘다고 발표 그리고 사우디 국영회사인

아람코는 4월부터 원유 생산량을 2월 대비 27%를 늘려 하루 1230만 배럴의 원유 증산을 예고

여기서 해석이 두 개로 갈리는데 

 

러시아에게 까불지 말라고 경고를 한 것과 코로나로 인해 원유 수요 감소가 예상되자 엄청나게 기름을 찍어내고 가격을 낮춰 수요를 부추기려는 것

 

필자가 봤을 땐 러시아와 사우디 간의 힘싸움이다.

 

 

 여기서 러시아는 물러서지 않는데 

이런 기사를 내버리고 만다 사우디에게 자신 있으면 한번 유가를 내려 보라는 것.

 

 

하나 5~6월 OPEC+ 회동에는 정례회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

조금 이상한 게 있다. 분명 치킨게임 같아 보이는데 코로나와 겹친 하필 이 시기에 증산을 시켜 달러와 직결된

유가를 건드린다? 자기들의 국가 수익의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사업을 말이다.

 

유가 전쟁에 관해 다른 시각이 등장하기 시작

바로 산유국들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판을 깔고 있다는 것.

참고로 OPEC+는 2016년부터 서로 감산을 약속하며 국제유가를 유지해 왔다.

이 때문인지 미국의 셰일 오일 생산량 증가로 이어져 결국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 자리에 오르게 된 것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 아무리 러시아랑 사우디가 짜고 쳐도 셰일 더 많이 뽑고 미국이랑 싸우다 보면 사우디 러시아가 물러서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 셰일 기업들은  셰일층에서 고압의 액체를 분사해서 원유와 가스를 뽑아내는데 

셰일은 채굴 비용이 비싸다는 것이 단점이다.

유가가 낮아지면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는데

 

사우디와 러시아가 유가를 하락시키면 미국의 셰일가스 기업들이 도산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 원래 (셰일가스가 유가로 인해 이득을 보기 위해선 50배럴이어야 한다. 하나 현재 국제유가는 24.67달러에 거래된다 )

 

이렇게 되면 미국은 코로나 악재와 셰일 기업 줄 도산이라는 최악의 경제상황을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과연 진실은 무엇이며 미국은 하락하는 유가를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

 

 

오늘 알아볼 트레이더는 바로 19세기와20세기 주식계의 전설 

"제시 리버모어"

풀네임: Jesse Lauriston Livermore (제시 로리스턴 리버모어)

생애:    1877년 7월 26일 - 1940년 11월 28일 (만62세)

출신지: 미국 매사추세츠 주 출신

그를 가르키는 별명

월스트리트의 곰, 추세매매의 아버지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그 당시 주식판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현재도 쓰이고 있는

가격이 오르면 사고, 내리면 공매도를 하는 이른바 추세매매를 창시한 사람이다.

그의 생애

참고용사진 Paine Webber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리버모어는 여기에 계속 있다간 앞날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10대 초반에 5달러(한화 약 13만원)를 들고 보스턴으로 갔다. 보스턴의 증권브로커회사인 페인웨버( Paine Webber)에서 주식호가판을 정리하는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

1892년 15세의 나이에 그는 시카고, 벌링턴, 퀸시 레일로드에 있는 버킷샵 에서 5 달러를 베팅하게 되고 (여기서 버킷샵은 주가에 베팅을했지만 주식을 사거나 팔지 않은 시설이다  한마디로 도박판과 비슷하다 좋게 포장해서 투기랄까)  그는 $5를 베팅하고  $ 3.12를 받게 된다. 

리버모어는 페인 웨버 (Paine Webber)에서 일할 때 보다  버킷 샵에서 더 많은 거래를 하며 수익 또한 버킷샵에서 벌어들이는게 훨씬 많았으며 

16세의 나이에, 그는 페인웨버를 그만두고 버킷샵에 인생을 올인 하기 시작. 

허나 그당시 제시 리버모어의 어머니는  버킷샵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그 당시 버킷샵은 도박판에 가까운 이미지였음). 그러나 제시 에버모어는 버킷샵에서 큰 수익을 낸 후 어머니에게 1,000 가져다 드리며 자신이 하는 것은 도박이 아니라 투기를 하는 중 이라며 반박했다. (5달러를 1년만에 1,000달러로 만들 정도면 .. 재능이 엄청났었나 보다.)

너무 주식을 잘한 탓 일까 버킷샵에서 출입 금지를 당하고 만다. 

허나 변장까지 해가며 버킷샵을 출입 결국 10만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저축하여

월가로  가게되며 그곳에서 거래를 시작한다.(이미 신이다.)

현재 알려진 제시 에버모어의 시작

1900년대 월가
시세테이프

월가에서 거래하는 동안 시세 테이프 가 현재 거래 결정을 내릴만큼 충분히 빨리 업데이트되지 않아서 파산하게 된다.

 그런 다음 세인트 루이스로 이사하여 버킷 샵에서 베팅을 하며 다시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

그의  큰 수익은 1901년 24세때 였다. 

 

 

북태평양철도 로고

북태평양 철도주식을 사고 난 후 그는 $10,000를 $500,000까지의 수익으로 바꿔낸 것

(현재로 치면 약 1220만원을 6억이상으로 불려낸 것 미래를 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 이후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상황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주가가 급락하자 지속적인 공매도로 엄청난 돈을 벌게 되는데

1907년에 뜬금없는 대폭락이 나타나고 공매도로 또다시 엄청난 돈을 벌게 된다.

리버모어는 그 때 아침시가에 공매도를 시작하면  투매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당시 제시 리버모어는 하루에  100만달러를 벌어들이게 되는데 

미국 은행의 큰손이라 불리는 J.P 모건이 제시 리버모어에게 공매도를 자제 해주라며 백기를 든다 ㄷㄷ  리버모어는 1907년  순자산 가치를  300만달러로 만드는데 성공하게 된다.)

1929년 여름에 시장은 초강세분위기였다. 리버모어는 시장이 보합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파악하고 본격적으로 공매도에 돌입했다. 다른 사람들은 리버모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해 가을 대폭락이 시작되고 그 유명한 1929년 경제 대공황이 오게 된다.

그는 천문학적인 가치의 돈을 벌게되며 언론에서는 리버모어의 매도포지션이 폭락을 촉진했다고 비난할 정도 

약 1억 달러(현재 가치로는 최대 2조까지라고한다.)를 벌게 되었으며  그에게 "월스트리트의 큰곰"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해준다.

일련의 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는 대중의 충돌로 비난을 받고 사망위협 받아 무장한 경호원 을 고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투기 센스에도 불구하고

1934 년 미국증권 거래 위원회가 창설 되고 난 뒤 그의 거래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조사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재산 몰수와 비슷한 처벌이 내려진 듯 그는 결국 재산을 잃었고 1934년에 세 번째로 파산을했으며 84,000 달러의 자산을 잃고  250만 달러의 부채를 기록했다

1940년 11월 28일 모든 자산을 날리고 거래소에서도 쫓겨난 리버모어는 한 호텔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19~20세기의 트레이더 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세계의 투자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존경과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말년엔 불행 했을지 몰라도 그의 감각적 투자는 지금도 따라올 수 있는 트레이더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제시 리버모어의 명언

시장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견해는 틀린다

대장주들을 따라가라

투자는 없고 오직 투기만 있다

주식에서 돈은 일 년에 매일 또는 매주 연속적인 트레이딩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익은 항상 자기 관리를 하지만, 손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실업수당이란?

실업 보험의 규약에 따라 근로자가 실업하였을 때에 지급하는 수당.

간단히 의미하면 이렇지만

 

 

지금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보면 미국 실업수당이 상위 랭크로 올라와 있다.

과연 좋은 일인 걸까? 나쁜 일 있은 걸까? 그리고 이 실업수당이라는 것이 현물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1 실업수당청구건수가 중요한 이유

우선 실업수당의 경우 시장 영향력이 있는 5가지의 경제지표가 존재하는데 그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1등은 고용보고서

2등은 소비자물가지수

3등은 ISM제조업구매자지수

4등은 생산자물가지수

5등은 주간 실업수당 청구건수 

이다.

#2 실업수당이 미치는 영향

 

실업수당 청구 건수가 증가하게 되면

표로 나타내 보면

실업수당 청구건수 증가→노동인력의 감소를 의미 →가처분 소득 감소로 이어짐

→개인소비가 감소 → 개인소비의 감소로 인한 GDP 감소 →인플레이션 하락→ 시장금리 하락 → 채권 가격의 상승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더 간단하게 얘기를 해보자면  미국의 경우 매주 목요일마다 실업수당 청구 건수를 발표하는데 

2차 오일쇼크 당시인 지난 1982년 세워진 종전 기록 69만 5천 건을 훌쩍 뛰어넘는 역대 최대치다.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에는 65만 건까지 늘어난 과거가 있는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 주 만에

평균 20만 건에서 약 328만 건으로 15배 이상 증가했다는 것. 실업대란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미국에선 해당 주에서 6개월 이상 취업해야 하거나 특정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실업수당을 받지 못하는 등의 불이익이 있기에 더욱 위험한 상황이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미국은 이미 제로금리를 전망하고 있다는 것 

시장에 이미 돈을 풀대로 다 풀고 슈퍼 양적완화까지 시도하는 마당에 실업수당 신청 건수가 역대 최고치가 된다면 소비심리 위축과 함께 슈퍼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해진 상황이다.

#3 실업문제가 심각해지면 부동산에 까지 영향을?

 

코로나로 인해 경기침체가 심각해지고 극심한 실업 쇼크가 오게 될 경우 근로소득의 일정 부분이 주택구입 대출의 원리금 상환에 투입될 수 있으며 담보대출 시장을 경유해 주택시장이 하방으로 갈 수밖에 없으며 부동산 거품이 심한 지금 이 사태까지 벌 어질 경우 부동산 버블이 터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실업 쇼크가 오게 된다면 우리나라 또한 그 역풍을 피해 갈 방법은 없다고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8년부터 고용쇼크와 함께 실업률 문제도 아직까지 대두되고 있는 상황

또한 최저시급을 올린 이유는 물가상승률에 비해 임금상승률이 매우 낮기 때문이라는 점은 알고 있다.

하나 우리나라의 물가의 경우 정말 고품질이기에 그 물건의 값어치가 오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한다.

과연 A란 물건이 80년대에 비해 지금 와서 더 쓸모가 많아져서 물가가 오른 것일까?

우리나라는 임금을 결정할 때 물가를 봐야 할 것이 아니라 노동생산성을 봤어야 했다.

단순히 GDP 상위 국가로써 볼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제한 양적완화 

우선 양적완화란?

기준금리 수준이 이미 너무 낮아서 금리 인하를 통한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때 중앙은행(우리나라로 치면 한은)이 다양한 자산을 사들여 시중에 통화공급을 늘리는 정책이다.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 부채를 늘리는 방식으로 경기를 부양하려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사들이는 자산은 국·공채나 주택저당증권 (MBS), 회사채 등 다양하다. 미국, 영국, 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금융위기 이후 일제히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이렇게 양적완화로 돈이 풀리면 이들 선진국의 통화가치는 하락한다. 반면 넘치는 유동성이 신흥국으로 유입돼 신흥국의 통화가치를 끌어올리게(신흥국 통화의 환율 하락)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금리를 낮춰 은행에 묶여있던 돈을 나라 경제시장등에 풀었으나 경제 침체가 완화될 기미가 안 보이고 더 이상 금리를 낮출 방법이 없을 때 양적완화를 시도한다.

침체된 자금 유동성을 풀어주기위해 화폐나 채권 자산 등을 사들이고 자국 화폐를 찍어내서

시장전체에 화폐를 공급하므로 자금 유동성을 높이는 것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문제가 많다. 그중 

 

첫 번째

 

로는 일전에 앞에서 배웠던 기축통화가 아니란 점이 문제인 것. 미국에 경우 무제한 양적완화를 할 시 기축통화이기에 달러 환율을 떨어뜨리며 대신 세계 전체에 유동성을 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기축통화라는 것 자체의 메리트도 있고 회복력도 강한 편이어서 양적완화가 가능할지

모르나 우리나라처럼 기축통화도 아니거니와 자국 내 화폐보다 가치가 높은 불, 유로 등이 있는데 여기서 무제한 양적완화를 실시할 시 자국 내의 원화가치만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할 확률이  존재하기 때문에 무제한 양적완화가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두 번째

문제는 우선 우리나라의 경우 코로나 때문에 생긴 소비위축으로 경제가 침체되어 유동성을 공급하고자 하는 것 일 수 있으나 사진에서 보다시피 우리나라의 경유 화폐 유통속도가  매 해마다 하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애초에 소비심리 문제가 아닌 기본적인 자금 유동성이 없었기에 소비위축 때문에 화폐의 유동성 공급을 위해 무제한 양적완화를 실시한 다는 것이 의문이다. 

세 번째

 

미국의 경우  금리가 2퍼센트 부근에서 제로금리 근처까지 내려오며  양적완화를 택하였으나  하나 우리나라의 경우 금리를 인상할 시기를 놓쳤으며 미국의 경우 2프로 때에서 제로금리까지 내려올 수 있었으나 우리나라 같은 경우 2퍼센트였으면 지금쯤 0.75로 인하를 하여 양적완화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 있었다. 

 

과연 무기한 양적완화가 우리나라에게 심폐소생술이 가능한가? 그리고  이후에 이 경제 침체를 벗어나고 나면 부메랑으로 돌아오지 않을 꺼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에 글쓴이 생각에는 양적완화 카드를 벌써 꺼내야 했는가 싶다.

총선을 위한 카드일 뿐 인가? 

 

참고로 BNF는 필자가 제일 좋아하고 동경하는 트레이더다

BNF(코테가와 타카시)

BNF

 생년월일:1978년 3월 5일(만 42세)

 고향: 치바현 이치카와시

 알려진 현 거주지: 도쿄도 미나토구

일본에서 알려진 최고의 슈퍼개미 BNF 란 이름은 그가 존경하는 미국인 트레이더 Victor Niederhoffer의 이니셜을 참고하여 만든 것으로 원래는 VNF이나 일본식 발음을 하다 보니 BNF로 된 듯하다.

한 사건에 의해 제이 컴남 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어떻게 대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주식투자를 시작하게 된 것 일까?

1998년NHK "머니혁명"

그의 인생을 뒤바꾼 것은 바로 

98년에 NHK에서 "머니 혁명"이라는 다큐식의 주식 관련 방송이 나오는데

당시 시대는 투기의 전문가들이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세계를 맺고 노벨상 수상자 의한 금융 공학을 구사해 막대한 이익을 올리는 한편, 세계 금융 혼란 러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에 심각한 재정 위기를 초래했던 시절 해외의 개인투자가가 굉장한 금액을 버는 것에 충격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용돈을 모아 160만 엔(한화 약 1600만 원)을 모은 뒤 2000년 주식을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때까지 주식서적은 1권 정도만 읽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VNF가 집필했던 책이 2권이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둘 중 어느 책인지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 

그러던 그가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제이컴남 신문

때는  05년 일본에 상장되어있는 제이컴의 주식 주문 실수가 발생한다. 05년 12월 8일 미즈호 증권사에서 61만 엔 1주 매도를 1엔 61만 주 매도로 주문 실수를 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67만 엔의 시초가에서 그는 64만 엔에 50주 매수 주문을 넣었는데 63만 엔에 거래가 되었다.

다시 50주 주문을 넣었는데 계속 하락하는 것을 보고 바로 1000주씩 주문을 넣어 총 7100주를 매수하게 된다. 우연과 실력과 자금력이 겹쳐 미친 주식 수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후 증권사에서는 주문 실수를 막고자 계속해서 매수주문을 체결(주식시장의 요소 운+실력+자금을 다 가지면 이렇게 되나 보다)

77만 2천 엔에 1100주를 매도 나머지 6000주는 91만 2천 엔에 매도하여 하루 만에 22억 엔(약 220억)의 이득을 내고 그 뒤로 제이 컴남으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가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이 사건으로 BNF가 부자가 된 줄 아는 사람들이 있고 그저 이 운 하나로 자금이 뻥튀기된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 BNF의 재산은 아래 표에 처럼 나와있었습니다.

BNF자산의 변화

2000 년 10 월 164 만 엔
2000 년 말 280 만 엔
2001 년 말 6,100 만 엔
2002 년 말 9,600 만 엔
2003 년 말 2 억 7,000 만 엔
2004 년 말 11 억 5,000 만 엔
2005 년 말 80 억 엔
2006 년 말 157 억 엔
2007 년 말 185 억 엔
2008 년 말 240 억 엔
2011 년 부동산 자산만 210억 엔
2017 년 400억 엔 이상으로 추정

이미 2000년도 1600만 원으로 시작 2005년 저 사건 전에 이미 110억 이상이 있었다.

거래사진

2007년 당시 BNF는 하루 700개의 관심종목을 보고 있었으며 흔히 가치투자의 기본 지표라 불리는 PER, PBR(저평가 주식을 찾을 때 쓰는 기본 수치)등 수치는 보지 않고 매매한다고 한다.

이유는 주식을 장기 보유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업실적이 좋아도 주가가 내리면 패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수익을 내도 괴롭다고 하며 그만두고 싶은데 머릿속이 주식 생각으로 가득 차버려 그만둘 수 없다고 했었다.(아마 주식중독이 원인이 아녔을까 한다.)

장이 안 열리는 휴일은 산책을 주로 한다.(참고로 너튜브 영상에서도 산책하는 영상이 존재하며 일본 드라마의 주인공 같다.)

펀드에 투자는 절대 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이미 그는 그 당시 일본의 모든 펀드들의 수익률보다 자기가 직접 낸 수익률이 몇 배나 많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증권사에서 일할 생각은 없다고 하며, 머릿속의 주식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싶어서 경제 프로그램, 증권 방송은 일절 보지 않는다고 했다.(자신의 매매 관점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술을 하지 않는다고 하며, 여행 같은 것도 가본 적 없다고 한다.(아마 위에서 말했듯 주식 생각으로 인해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BNF의 알려진 매매법

25일 이동평균선보다 아래에서 가격이 형성된 종목을 주로 매매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의 경우 20일 이기에 25일 이동평균선이 아닌 20일 이동평균선을 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상승 시에는 시총 상위주를 매매한다고 한다. 아침 8시 15분에 일어나서 야간선물, 미국 증시의 확인을 한다. 그리고 취급 종목의 뉴스들도 확인을 한다. 점심 휴장시간에 컵 가락국수로 끼니를 때운다. 장롱 운전자라서 운전은 직접 하지 않는다. 신용카드가 없으며 현금도 거의 갖고 다니지 않는다.(지금도 일본은 신용카드보다 현금 문화가 더 크다. 하물며 10년 전인 당시엔 어떨라나)

10분 만에 수천만 엔에서 수억 엔을 잃을 때도 빈번하므로 현금이 눈에 보이면 정신적 대미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주식으로 수익내고 있는 것은 친구들에게도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식거래가 재미는 없지만 끊기가 어려워서 계속하고 있으며 자신과 같은 젊은이를 네오 니트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애널리스트의 리포트, 경제지도 읽지 않는다. 타인의 의견에 영향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스윙 트레이더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배우지는 않았다(근데 법대를 중퇴한 사람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미 머리가 굉장히 좋은 편)

하락장에서는 20일 이평선과의 가격 괴리율이 그 업종에서는 평균 x%에서 반등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장 종료 전에 매수 후에 다음 거래일 장 시작 후에 팔아버리는 전략을 구사하고, 상승장에서는 예를 들어 반도체 대장주인 삼성이 상승할 때 SK하이닉스나 동종업종인 SFA반도체 등이(2 등주나 3 등주를 노리는 듯) 뒤쳐지고 있다면 뒤쳐지는 종목에 투자하는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멈추면 종합지수가 천정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 그도 손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BNF의 손실

2008년 9월 리만 브라더스 주식을 취득했지만 2일 후 리만브라더스가 파산하여 7억 엔(한화 약 70억)

의 손실을 입었다.(이건 좀 운이 많이 없는 케이스인 것 같다.. 하필 2일 후 휴지조각이라니..)
금전 손실은 아니지만 거래액이 엄청나기 때문에 기업이 제공하는 대량보유 보고서에 본명, 주소, 전화번호 등이 공개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분노하여 모니터를 전부 부쉈다고 한다.

이후의 BNF의 소식

쵸무쵸무

2008년에 아키하바라 앞의 지상 10층 지하 1층 상업빌딩 '쵸무쵸무 아키하바라'를 90억 엔에 구입했다. 임대료 수익이 목적이 아니라 자산 분산의 목적이라고 한다.(근데 지금 엄청나게 올랐다 부동산도 엄청 잘하는 듯)

 

 

ZONE


2011년에 아키하바라의 부지면적 800㎡ 지상 6층 지하 2층 상업빌딩 'AKIBA컬처 즈 ZONE'을 구입했다. 이 빌딩의 시세는 약 170억 엔(한화 약 1700억)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빌딩을 구입하기 전에 보유하고 있던 주식들을 전부 처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0억엔(한화 약 1700억) 짜리를 현찰로(허..)

매입했으며, 이후로도 도쿄 중심가의 빌딩을 계속 매입하여 현금으로만 매입한 빌딩이 2018년 당시  7채 정도로 알려져 있다.

BNF의 현재는 이 건물들에서 나오는 월세를 통해 수입과 주식투자를 하는 자금을 마련하는 건물주가 되었다. 
NHK에 2017엔가 취재를 한 적이 있는데, BNF 본인의 얼굴도 많이 바뀌었다.

 

 

구글어스:https://www.google.co.kr/intl/ko/earth/

안녕하세요 오늘 알아볼 건 구글어스입니다.

참고로 필자는 여행을 가보고 싶긴 하나 성격상 방구석이 좋고 돈도 없습니다ㅠㅠ

자 저와 같은 처치의(?) 사람들을 위한 엄청나게 유용한 ㅋ 사이트죠. 

(요즘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기도 좀 그렇고요 집에서 여행 떠나보자고요~)

자 구글어스가 뭘 하는 거냐

바로

저같이 방구석에 살면서 다른 나라는 가보고 싶다! 하지만 책이나 사진으로 보면 일일이 어디 지역 검색을 해야 하고 발로 뛰는 느낌이 없잖습니까. 요즘 코로나바이러스도 그렇고 밖에 나가기도 힘들고요 넷상 여행 한번 떠나 보는 거죠. 

그걸 해소해주기 위해 3D로 구현된 실사 사진들을 볼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아 참고로 Internet Explorer로는 구현이 불가능하니 크롬 또는 타 웹 브라우저를 이용하셔야 

작동이 가능합니다.

 

자 이런 식으로 구글에 구글어스라고 검색을 하시면?

자 저 창을 클릭해줍니다.

자 이제 어스 실행을 클릭합니다.(여기서 주의할 점이 가끔 너무 저사양 컴퓨터인 경우에는 실행이 안된다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아무래도 3D 구현이라 그런지 참고하세요)

자 이런 식으로 나오죠?

자 뭐 우리나라 한번 가볼까요?

아 참고로 

처음 확대를 하면 이런식으로 나오는데요 저기서 오른쪽 하단의 사람 모양을 클릭해주시면

노란색이 되며 활성화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파란색 표시가 난 곳 만 가볼 수 있습니다 나머진 위에서 위성으로 본모습뿐 차로 직접 가본 곳만 표시가 되는듯합니다.  뭐 근데 웬만한 곳은 다 가볼 수 있습니다!

약간 다음뷰 같습니다.

광화문 한번 가 볼까요

사진으로만 보는데도 웅장하네요

여기엔 올리지 못하였지만 지나가는 행인들도 사진에 찍혀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긴 했네요.

그리고 아직 갱신이 되지 않아서 과거의 공사장 모습이라던가 찍힌 곳도 있답니다.

자 그다음은 제가 꼭 가보고 싶지만 한 번도 못 가본 ㅋㅋ 뉴욕으로 떠납니다.

캬.. 뉴욕 증권거래소.. 

이렇게 보는데도 엄청 웅장하네요.

이런 식으로 여러분이 가보고 싶은 어디든 (구글어스에 등록만 되어 있다면)

가볼 수 있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기능도 존재하는데 왼쪽 상단 메뉴바에 있는 돋보기 아래에 있는 주사위를 클릭하면 무작위로 관광명소로 데려다준답니다. 

처음 접할 땐 꽤 재밌답니다. 이걸로 여행 계획? 을 세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요즘 밖을 나가기도 두렵고 집에만 있자니 너무 지루하신 분들은 구글어스를 통해 가상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음뷰도 있지만 구글어스는 전 세계를 모두 탐험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인 거 같습니다.

그럼 우리 모두 행복한 하루 보내자고요~~

다음번엔 좀 더 알차고 좋은 정보를 여러분께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워런버핏(Warren Edward Buffett)

이름: Warren Edward Buffett(워렌 에드워드 버핏)

국적: 미국

출생:1930년 8월30일(한국나이 90세)

미국 네브래스카 오마하

신장:178CM

오늘 알아볼 사람은 역사상 최고의 주식투자자 이자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리는 남자 

'워런 버핏'에 대해 알아보자.

워런 버핏의 일대기

6살 워런 버핏

 

6살 때 껌과 콜라를 팔았다고 한다.(이미 6살에 경제에 눈을뜬 천재인가?)

나는 6살때 뭐 했더라..

11살 워런 버핏

11살 때 차트를 보고 Cities Service (석,가스를 다루는 회사)를 1주에 38달러에 총6주를 매입

40달러에 매도 했으나 후에 200달러까지 치솟음(이후에 장기투자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Cities Service

 

AT&T

12살쯤 워싱턴으로 이사를 감. 선생님이 AT&T 주식을 갖고 있다고 하자 AT&T를 공매도 한 자신의 거래내역서를 보여줘 선생님의 기를 찍어누름 ㄷㄷ

15살에  

자산 2천달러중 1천200달러로 오마하 북부의 농지 49,000평을 사서 관리인을 고용한 후 농장으로 돈을 벌기 시작

17살에

그의 친구와 함께  고장난 

25달러짜리 핀볼기계를 사서 고친후  동네 이발소에 공급하는 대신  그 수익금의 일정액을 챙기기로 했고 

(핀볼 기계를 설치하게만 해주는댓가로 이발소 사장님은 핀볼기계의 20%수익금을 챙기게 해줬다. 이미 엄청난 사업수완을 보여준다. )

 

25달러짜리 기계로 

하루만에 4달러를 벌어들인다. (나이를 생각하면 ..) 이후 핀볼 수리업자와 자기친구 버핏은 

Wilson's Coin-Operated Machine 이라는  회사를 설립 고장난 핀볼기계를 25달~35달러에 7대정도를 구매 하였고 

동네의 다른이발소에들도 핀볼기계를 설치 

1년 후 동업자인  핀볼 수리업자에게 이 사업을 1200달러를 넘기게 되며  자산 6천달러 돌파 

초등학생 때부터 월반해서 동기들보다 일찍 대입 자격을 획득했다. 그러나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투자와 사업으로 이미 경제적 성공을 이뤘기에 자신을 사회인으로 생각했고 대학 진학은 시간낭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이 자신을 가르치기에는 수준미달이라고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결국 대학 진학을 하게 된다.(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데 거꾸로 부모가 자식을 이긴 케이스인가)

허나 아버지도 월가 출신 이기에 .. 

 

 

본래 펜실베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경제학부에서 2년간 배우다가, 네브래스카 대학으로 옮긴 뒤 조기졸업으로 학사를 취득하고, 컬럼비아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취득했다.

네브래스카 대학교

네브래스카 대학 학부 졸업 후 그는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지원했으나 면접을 망쳐서 떨어졌다. 후에   버핏이 그의 친구에게 말하길 "난 하버드의 네임밸류, 즉 간판이 탐이 났던 것 같아. 하버드가 원하는 인재상이랑 나랑 맞지 않았던 것 같아. 반성해야지."라고 말했다고. 하버드에 떨어진 후 다시 대학원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때 찾은 것이 바로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이다.(이 컬럼비아 경영대학에서 버핏은 (이미 대단한 천재이지만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얻는다 마치 스포츠카에서 제트기 엔진까지 생긴 느낌이랄까))

 

그곳에서 벤저민 그레이엄 만난다.

그레이엄은 필립피셔와 함께 버핏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

워런버핏 말로는 15% 피셔에게 85%는 그레이엄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이니 주식투자에 관련된 서적 중에서 그레이엄과 피셔의 것을 능가하는 것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할 정도이다.

 

이로써 워런버핏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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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는 필자의 개인적 생각이다.

허나 한국주식시장에서 워런버핏을 믿고 장기투자를 하다가 돈이 휴지조각이 됐다는 경험담을 많이 들어볼 수 있다.

워런버핏은 한국사람이 아닌 미국사람이다. 

100년 다우지수

이 차트만 봐도 답이 나온다 .. 워런의 나이 90세 100년짜리 차트로만 봐도 워런의 가치 중장기 투자적 관점대로면 살아남을 수 있는 시장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워런버핏과 동시대에 살아도 저렇게 벌 수 있을리 없다. )

한국 지수

20년짜리 차트를 가지고 100년과 비교하는게 말이 안되긴하나 우리나라 시장의 경우 대외적 충격에 너무 쉽게 흔들리는 경향이 있고 미국시장처럼 자금유동성이 활발한 것도 아니기에 워런의 투자관을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온전히 접목 시키기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우리는 살면서 메신저 앱 하면 보통 네이버 라인, 페이스북 메신저 , 카카오톡 등을 떠올리는데 요즈음 들려오는N번방 사건

그리고 그곳에서 언급되는'텔레그램'

도대체 텔레그램이 뭐하는 앱 일까? 

필자와 함께 알아보자.

 

텔레그램

텔레그램의 앱 이미지

우선 텔레그램은 우리가 흔히 아는 카카오톡 , 네이버 라인, 트위터,와 같은 인스턴트 메신저의 종류중 하나인 앱이다.

2013년 8월23일 첫 발매

독일 Telegram Messenger LLP사가 개발/운영 중인 오픈 인터넷 모바일 메신저이다.

 

처음엔 러시아에서 시작 하였으나 개발자측과 러시아 정부간의 다툼 끝에 독일로 넘어가 결국 독일 어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자 우리가 알고싶은건 이딴게 아니다 

그 많고 많은 어플 중 왜 하필 텔레그램은 항상 이런 사건에 엮여있는걸까 그 이유는 ?

보안이 굉장히 좋기 때문인데.

카카오톡 사찰 사태 당시, 언론에서 안전하다고 얘기한 것은 텔레그램의 비밀 대화를 말한다. 비밀 대화는 종단간 암호화를 적용하여 두 단말기 간에서만 복호화가 가능한 비밀키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서버는 암호화된 메시지를 단순히 전달해주는 기능만을 하기 때문에, 서버에 감청영장이 부과되어도 볼 방법이 없다. 여기에 추가로 자동 대화 삭제 등의 기능도 제공하며, 카카오톡 등에서 제공하는 대화 내용 저장 기능도 보안 문제라고 제공하지 않고 있다.

비밀대화?

비밀 대화의 경우 모바일 버전에서만 이용 가능하다. 비밀 대화에서는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언제든지 지울 수 있으며, 지운 메시지는 상대방의 화면에서도 지워진다. 또한 (텍스트, 이미지, 동영상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메시지를 보낸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메시지가 자동으로 삭제되는 '자동 삭제 타이머'를 설정할 수 있으며 
비밀 대화에서 스크린샷 기능을 사용해 대화를 캡쳐하면 스크린샷을 찍었다는 알림이 상대방에게 뜬다. 하지만, 안드로이드에서는 캡쳐 자체가 차단된다.

원래 증권가에서 암암리에 사용하던 앱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한국내의 특정 메신저를 사용하다가, 검찰이 요청한 대화 내용을 운영사가 제공하는 바람에 구속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돌자 대화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한 보안 기능 때문에 인기를 끌었는데, 2014년 9월부터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 팀 신설에 대한 소식을 시작으로 일반 이용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으며, 카카오 사찰논란이 터지자 완전히 이용자가 폭증하게 되었음.
증권가에서나 세간에서나 사용하는 이유는 비슷하다.

이미 한국 내 이메일 업체들이 수사 협조 요청 한 방에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간단하게 검찰에 제공하는 모습이 이슈가 되자 유저 상당수가 Gmaill(구글이메일)로 갈아탔던 시기가 있었다. 구글도 요새 세계 각국에서 정보 제공 요구에 협조하는 경우가 늘었지만 한국은 이미 한국 내 업체부터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시 되기에.. 
암튼 이래서 텔레그램으로 넘어갔었다.
카카오톡이 이미 시장을 독점한 상황에서 텔레그램이 대체재로 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위와 같은 국가 기관의 무분별한 사찰에 대한 반발이었다. 러시아의 사찰을 피해 독일로 망명할 정도로 소신이 뚜렷하고, 상업적인 부분에서도 타협이 없는 업자라면 개인 정보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심지어 제 손으로 편집까지 해서 바친 카카오보단 좋다 생각한듯.테러 방지법 이 통과되면서 텔레그램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다시 오르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요즘들어 텔레그램이 자주 등장하기에  흔히 영화에서 보는 그런 메신저 처럼 비춰질지 모르나

필자가 보기엔 그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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